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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27

못생긴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딜레마인데 나는 어떻게든 나를 감추고 털고 닦고 깎고 칠하며 척, 하고 산다 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있는 척 아는 척 착한 척 뒤에서는 호박씨 까지만 아닌 척,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를 봐주는 건 그래도 척 때문인데 척은 처 억 탄로가 난다 못생긴 것은 아무리 가려도 1분 안에 탄로가 나고 무식한 것은 길어야 한 시간 안에 없는 것은 한 달 안에 척하지 않는 것은 1년 안에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1년 이상 남지 못한다 끊임없이 척을 생산해야 한다 1분씩 한 시간씩 한 달씩 1년씩 오늘도 나를 지탱해 주는 척! 원구식 시인의 '척'이라는 시. 우리는 척하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지도 모른다. .. 2023. 9. 6.
청동 염소 은행 앞에 청동 염소가 서 있다 엉덩이가 푸른, 생식기마저 푸른 염소, 아무것도 생식하지 않을 이 염소는 불멸이다 허수경 시인의 '청동 염소'. 염소는 번식력이 강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은행 앞에 선 염소는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정작 청동 염소는 생식生殖을 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불멸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 하긴 자본의 증식이나 동물의 번식을 떠나 오래전 청동기 문명을 입힌 저 염소 상像이 소멸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2023. 7. 29.
강원도의 돌 나는 수석水石을 전연 모르지만 참 이쁘더군, 강원도의 돌. 골짜기마다 안개 같은 물 냄새 매일을 그 물소리로 귀를 닦는 강원도의 그 돌들, 참, 이쁘더군. 세상의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리. 물속에 누워서 한 백 년, 하늘이나 보면서 구름이나 배우고 돌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더군. 참, 이쁘더군. 말끔한 고국故國의 고운 이마, 십일월에 떠난 강원도의 돌. 마종기 시인이 독자와 대화하듯 써 내려간 시. 시제는 그냥 돌도 아니고 '강원도의 돌'이다. 거기다 말끔한 고국의 이마를 닮은 돌. 돌에 투영된 시인 자신의 인생관에 고국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까지... 느낌이 온다. 2023. 7. 25.
피아노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봉건 시인의 '피아노'라는 시. 피아노 건반을 가볍게 두드리는 손놀림에서 물고기를 연상한다. 마치 음표가 살아서 튀어 오르는 듯한 바다를 닮은 무대 시인은 마침내 음악의 맛깔에 홀려서 회를 치려나 보다. 2023. 7. 22.
첫사랑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 분분 난 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고재종 시인의 '첫사랑'이라는 작품.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사람들은 그 허무를 달래기 위해 사랑을 꽃피우고 노래하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연이 압권이다. 2023. 6. 8.
빈집 울타리에 호박꽃이 피었고 사립문 거적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안 갔다는 표시였다. 옛날엔. 그런 날이면,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대청마루에 누웠다 가곤 했다. 뒤꼍엔 말나리 피었고 방문 창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갔다는 표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표시다. 지금은. 오늘 아침엔, 억수장마를 따라온 황토물이 사흘을 묵고 떠났다. 윤제림 시인의 '빈집'이라는 시. 어느 시골 마을 풍경으로 떠나온 우리네 고향을 떠올려도 될 거 같다. 자고로 집에 사람이 살아야 하는데 한쪽에서는 집 때문에 난리고 또 한쪽에서는 사연 있는 빈집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2023. 6. 2.
나도 그들처럼 나는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계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비의 말을 새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측량되기 전에는 나는 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해석이 되기 전에는 나는 대지의 말을 받아 적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동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시계가 되기 전에는 이제 이들은 까닭 없이 심오해졌습니다 그들의 말은 난해하여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측량된 다음 삶은 터무니없이 난해해졌습니다 내가 계산되기 전엔 바람의 이웃이었습니다 내가 해석되기 전엔 물과 별의 동무였습니다 그들과 말 놓고 살았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소용돌이였습니다 백무산 시인의 작품. 원시 이후, 인류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 난무하는 것은.. 2023. 5. 18.
가슴이 쿵쿵거리는 까닭 세상에는 아.름.답.네.요. 멋.있.어.요. 하며 치장한 말들이 많이 돌아다니지만 진정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입은 말門을 닫고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어쩌면 입보다 말은 먼저 알고 있다 당장 뛰쳐나가고도 싶지만 그의 요란한 발굽에 그의 뛰뚱거리는 몸짓에 그가 일으키는 바람에 혹시라도 아름다운 그것이 놀라거나 다치거나 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은 門앞에서 스스로 짧은 비명으로 멈춰선 뒤 발길을 돌려 가슴이라는 초원에서 숨이 차도록 뛰어다니는 것이다. 이명윤 시인의 '가슴이 쿵쿵거리는 까닭'이라는 시를 만난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 상 시마을에서 종종 본인 시를 올리고 또 내 시에도 댓글을 달아주던 시인으로 기억한다. 이즈음의 아름다운 꽃잔치를 보거나 여행 중 혼자 보기 아까운 경치를 보면.. 2023. 4. 29.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너희들이 좋구나 너무 좋아 쓰다듬어도 보고, 끌어안아도 보고, 그러다가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나, 너희들 들쳐 업는구나 너희들 나 들쳐 업는구나 우거진 잎사귀들 속, 흐벅진 저고리 속 으흐흐 젖가슴 뭉개지는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그렇구나 네 따뜻한 입김, 부드러운 온기 속으로 나, 스며들고 있구나 찬찬히 울려 퍼지고 있구나 너희들 숨결, 오래오래 은근하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껍질들아 껍질 두툼한 네 몸속에서 작은 풍뎅이들, 속날개 파닥이고 있구나 어린 집게벌레들, 잠꼬대하고 있구나 그것들, 그렇게 제 몸 키우고 있구나 내 몸에서도 상수리나무 냄새가 나는구나 쌉쌀하구나 아득하구나 까마득히 흘러넘치는구나 이은봉 시인의 작품이다. 상수리나무.. 2023. 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