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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27

풀벌레나 차라리 씀바귀라도 될 일이다. 일 년 가야 기침 한번 없는 무심한 밭두렁에 몸을 얽히어 새끼들만 주정 주렁 매달아 놓고 부끄러운 낮보다는 밤을 틈타서 손을 뻗쳐 저 하늘의 꿈을 감다가 접근해오는 가을만 칭칭 감았다. 이 몽매한 죄, 순결의 비린내를 가시게 하고 마른 몸으로 귀가하여 도리깨질을 맞는다. 도리깨도 그냥은 때릴 수 없어 허공 한 번 돌다 와 후려 때린다. 마당에는 야무진 가을 아이들이 뒹군다. 흙을 다스리는 여자가 뒹군다. 문정희 시인의 '콩'이라는 시. 콩을 소재로 해서 시를 썼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한국판 여자의 일생이랄까 뭐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무관심 속, 모진 시집살이로 자신을 위한 시간은 없었다. 그나마 남겨진 것은 야무진 가을 아이들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은 콩이나 여자.. 2023. 1. 8.
입적 '이만 내려놓겠네' 해인사 경내 어느 숲 속 큰 소나무 하나 이승으로 뻗은 가지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 지상으론 지천인 단풍 문득 누더기 한 벌뿐인 세상을 벗어 놓는다 윤석산 시인의 '입적入寂'이라는 시. 시를 편협되게 정의할 필요는 없다. 이런 시도 있고 저런 시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개인적 취향은 존중하고 싶다. 울림이 있고 깊이가 있는 시를 만난다. 2023. 1. 7.
마음은 무게가 없다 안동에서 서울로 오는 버스를 타고 동서울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할머니 한 분이 자기 키보다 더 큰 배낭을 짊어지고 거기다가 두 손에는 또 보따리까지 들고 내린다. 배낭에는 마늘이 들어 있고, 보따리에는 애호박 몇 개, 고추와 참깨가 들어 있다. 아들네 집인지 딸네 집인지 가는가 보다. 지하철 강변역 쪽으로 함께 걸어가면서 "할머니, 이 무거운 것을 어떻게 들고 가시려고 가져오셨어요?" 하며 보따리를 모두 건네받아 들어 드리자, "마음을 담아 왔지 별 거 아니야!" 한다. 그러면서 마음은 무게가 없다 한다. 마음은 아무리 담아 와도 무겁지 않다고 한다. 마음은 아무리 가져와도 힘들지 않다 한다. 윤동재 시인의 '마음은 무게가 없다'라는 시. 누구에게는 올 한 해 마음이 힘들었을 것이다. 허나 마음은 가꾸기 .. 2022. 12. 31.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 이 세상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시인은 붉고 둥근 대추알을 생각해 보라 한다. 거기 자연의 이치가 숨어 있다 한다. 거기 우리들 인생의 답이 있다 한다. 2022. 12. 30.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환한 등불 남을 온기 움직이는 별 멀리 가는 날개 여러 계절 가꾼 정원 뿌리에게는 부드러운 토양 풀에게는 풀여치 가을에게는 갈잎 귀엣말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저녁 서로의 바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파도 고통의 구체적인 원인 날마다 석양 너무 큰 외투 우리는 서로에게 절반 그러나 이만큼은 다른 입장 문태준 시인의 '우리는 서로에게'라는 시.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일까 서로를 얼마만큼 알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산문으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툭툭 던지는 언어에서 의미 이전에 스펙트럼이 다양한 감성을 읽어낸다. 2022. 12. 26.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정감 어린 고향 풍경을 떠올리며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간절히 소망하는 시인의 감성을 느끼게 한다. 2022. 12. 22.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 2022. 12. 18.
행복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나태주 시인의 '행복'이라는 시. 농담조로 던져 본 말이 있다. 인생이 별 거 있느냐고, 깊게 생각하지 말라며.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 그것이 답일 수도 있다는... 아무튼, 행복이 뭐 별 거 있냐라는 생각에는 대체로 이의가 없을 거 같다. 작지만 소박한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가까이서 위안이 되어주는 것이 행복이다. 2022. 11. 28.
민간인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담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스무몇 해나 지나서도 그 수심을 모른다 김종삼 시인의 '민간인'. 분단의 참상을 정제된 표현으로 잘 드러낸다. 70년이 지난 오늘도 남북의 분단은 현재 진행형이다. 잠시 화해하는가 싶더니 다시 얼어붙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 전쟁은 일어나고 많은 민간인이 죽어나간다. 시인은 뭇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고발자다. 2022.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