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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산책55

가엾은 리얼리스트 시골길이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흔해 빠진 아카시아 향기에도 넋을 잃고 촌뜨기 시인인 내 눈은 꽃그늘에 그늘진 농부의 주름살을 본다 바닷가가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낙조의 파도에 사로잡혀 몸 둘 바를 모르고 농부의 자식인 내 가슴은 제방 이쪽 가뭄에 오그라든 나락잎에서 애를 태운다 뿌리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른 가난한 시대의 가엾은 리얼리스트 나는 어쩔 수 없는 놈인가 구차한 삶을 떠나 밤별이 곱다고 노래할 수 없는 놈인가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김남주 시인... 가난한 시대에 태어나 리얼리스트로 살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2024. 4. 8.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시인의 시. 산다는 건 어쩌면 이기심의 발로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더 값지게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길은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23. 12. 13.
접기로 한다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 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 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 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박영희 시인의 시. 결혼식에서 접하는 주례사에 빠지지 않는 말이 있다. 서로 상대를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는 얘기. 이는 부부 사이를 너머 가족과 이웃에도 해당된다. 세상을 살며, 펴야 할 때가 있지만 때로 접을 줄 알아야 거기에 비로소 평화가.. 2023. 12. 4.
11월의 기도 11월에는 무언가 그리운 일이라도 있다는 듯 살 일이다 ​ 지나온 여름 다시 돌아갈 수 없고 떠나간 사랑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 11월에는 누군가 사랑할 사람이라도 있다는 듯 살 일이다 ​ 사랑은 종종 이별로 지고 단풍은 언제나 낙엽으로 지지만 ​ 11월에는 어디선가 따뜻한 커피라도 끓고 있다는 듯 살 일이다 양광모 시인의 시. 나이가 들면서 하나둘 빠져 버린 머리카락들 오늘따라 머리가 휑한 느낌 어느덧 올해도 11월, 날씨가 추워서일까 근심이 가라앉지 않고 의욕은 떨어진다. 감각도 무디어지는 것 같다. 양광모 시인처럼 기도라도 해 봐야겠다. 2023. 11. 16.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박용재 시인의 시 인생에 사랑이 없다면 인생을 헛되게 보냈다면 그저 메마른 삶이 아닐는지 그렇다면 그만큼은 진정 인생이 아닐 수도 있겠다. 인생에 사랑이 있다면 인.. 2023. 10. 22.
아름다운 관계 바위 위에 소나무 저렇게 싱싱하다니 ​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도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흐르고 흘렀던가 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 이끼들과 마른 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나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 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2023. 10. 15.
그리운 바다 성산포 12. 술에 취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이생진 시인이 쓴 '그리운 바다 성산포' 연작시 중 하나다. 쉽게 읽히면서도 예사롭지 않다. 파도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남녀가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는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느낌... 함께 술에 취해서는 말이 많아지고 술에 약한 바다의 파도 소리가 유독 더 크게 느껴진다. 2023. 10. 8.
마릴린 먼로 지붕 위에 마릴린 먼로가 앉아 있다 박꽃 진 자리 새 봉분처럼 둥근 엉덩이 하얗게 까붙였다 구멍 뚫린 어둠에 바짝 붙어 앉아 눈을 반짝이는 별들 찰칵, 몰래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샤넬 No.5 향기가 찍혀 나온다 아찔한 외출이다 최정란 시인의 시. 지붕 위의 둥근 박을 마릴린 먼로의 엉덩이에 비유하는 등 시인의 상상력이 뛰어나다. 그녀는 이 세상에 없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 2023. 9. 16.
못생긴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딜레마인데 나는 어떻게든 나를 감추고 털고 닦고 깎고 칠하며 척, 하고 산다 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있는 척 아는 척 착한 척 뒤에서는 호박씨 까지만 아닌 척,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를 봐주는 건 그래도 척 때문인데 척은 처 억 탄로가 난다 못생긴 것은 아무리 가려도 1분 안에 탄로가 나고 무식한 것은 길어야 한 시간 안에 없는 것은 한 달 안에 척하지 않는 것은 1년 안에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1년 이상 남지 못한다 끊임없이 척을 생산해야 한다 1분씩 한 시간씩 한 달씩 1년씩 오늘도 나를 지탱해 주는 척! 원구식 시인의 '척'이라는 시. 우리는 척하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지도 모른다. .. 2023.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