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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산책55

앙큼한 꽃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 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 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손택수 시인의 '앙큼한 꽃'이라는 시.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삶의 터는 정이 메마르고 여유와 배려가 사라진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그런 세상에는 하나같이 싸움이 늘기 마련이다. 2023. 8. 30.
청동 염소 은행 앞에 청동 염소가 서 있다 엉덩이가 푸른, 생식기마저 푸른 염소, 아무것도 생식하지 않을 이 염소는 불멸이다 허수경 시인의 '청동 염소'. 염소는 번식력이 강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은행 앞에 선 염소는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정작 청동 염소는 생식生殖을 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불멸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 하긴 자본의 증식이나 동물의 번식을 떠나 오래전 청동기 문명을 입힌 저 염소 상像이 소멸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2023. 7. 29.
강원도의 돌 나는 수석水石을 전연 모르지만 참 이쁘더군, 강원도의 돌. 골짜기마다 안개 같은 물 냄새 매일을 그 물소리로 귀를 닦는 강원도의 그 돌들, 참, 이쁘더군. 세상의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리. 물속에 누워서 한 백 년, 하늘이나 보면서 구름이나 배우고 돌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더군. 참, 이쁘더군. 말끔한 고국故國의 고운 이마, 십일월에 떠난 강원도의 돌. 마종기 시인이 독자와 대화하듯 써 내려간 시. 시제는 그냥 돌도 아니고 '강원도의 돌'이다. 거기다 말끔한 고국의 이마를 닮은 돌. 돌에 투영된 시인 자신의 인생관에 고국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까지... 느낌이 온다. 2023. 7. 25.
피아노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봉건 시인의 '피아노'라는 시. 피아노 건반을 가볍게 두드리는 손놀림에서 물고기를 연상한다. 마치 음표가 살아서 튀어 오르는 듯한 바다를 닮은 무대 시인은 마침내 음악의 맛깔에 홀려서 회를 치려나 보다. 2023. 7. 22.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를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이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유안진 시인이 쓴 '키'라는 시. 내 몸의 키만 생각하였지 미처 마음의 키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위 시를 감상하면서 자신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게도 되고요. 개인 간 또는 국가 간 싸우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2023. 7. 5.
감꽃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김준태 시인이 쓴 어른을 위한 동시풍童詩風의 시다. 단 몇 줄 시에, 인생을 녹여낸다. 그래,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만 먼 훗날엔 우리는 무엇을 세고 있을까 지난 그리운 얼굴들을 세고 있거나 남은 소중한 날들을 세고 있으려나 몰라 2023. 6. 29.
장미 누가 그 입술에 불질렀나 저토록 빨갛게 타도록 누가 몸에 가시 울타리 쳐 둘렀나 그 입술에 입맞춤 못하도록 나도 그 입술이고 싶어라 불타는 사랑의 입술이고 싶어라 이별이 내게 입맞춤 못하도록 가시 울타리 치고 싶어라 손석철 시인의 '장미'라는 작품. 유명한 시인이 쓴 시라 해서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건 아니다. 여름 가뭄에 콩 나듯 좋은 시 하나 건진다. 그만큼 시 창작이 쉽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누가 만약 위 '장미'라는 시를 저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썼다 해도 나는 믿었을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 작용하기는 했겠지만... 2023. 6. 23.
현주소 지금 나의 영혼은 내 고향 난실리에 나의 육체는 서울 혜화동에 별거를 하고 있다 해마다 햇빛 좋은 5월 하순이면 영혼이 사는 난실리 뒷산, 장재봉長才峰에선 온종일 노랗게 꾀꼬리 울며 육체가 머무는 서울 혜화동에선 골목마다 라일락이 진다 영혼이 홀로 꾀꼬리 우는 난실리로 육신이 붙어 있는 혜화동으로 오가며 이백리 길, 삐꺽거리는 팔순의 세월 고개 아 언제면 육체의 주소 아주 버리고 영혼의 주소 하나로 되어 만고일월萬古日月에 "나 여기 있소" 불변의 주소로 있을는지 오 꾀꼬리 소리, 이 나무 저 나무 노랗게 번쩍번쩍 라 랄라리오 라 랄라리오 조병화 시인의 시. 그의 시는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읽혀서 좋다. 팔순 노인이 노래하는, 현대판 사死의 찬미라 할까 노인이 되면 몸은 쇠약해지고 마음은 병들기 마련인데 .. 2023. 6. 13.
첫사랑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 분분 난 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고재종 시인의 '첫사랑'이라는 작품.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사람들은 그 허무를 달래기 위해 사랑을 꽃피우고 노래하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연이 압권이다. 2023. 6.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