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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산책55

백담사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절 마당을 쓴다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산에 걸린 달도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 쓸면 쓸수록 더 많이 돋아나고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 이성선 시인의 '백담사'. 산사에 저녁이 찾아와 그림자가 드리우니 마당에 삼라만상이 자리해 있다. 아마도 마음 마당이 아닐까 싶다.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빗자루질을 한다. 일이 아니라 수행이 된다. 2023. 6. 4.
빈집 울타리에 호박꽃이 피었고 사립문 거적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안 갔다는 표시였다. 옛날엔. 그런 날이면,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대청마루에 누웠다 가곤 했다. 뒤꼍엔 말나리 피었고 방문 창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갔다는 표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표시다. 지금은. 오늘 아침엔, 억수장마를 따라온 황토물이 사흘을 묵고 떠났다. 윤제림 시인의 '빈집'이라는 시. 어느 시골 마을 풍경으로 떠나온 우리네 고향을 떠올려도 될 거 같다. 자고로 집에 사람이 살아야 하는데 한쪽에서는 집 때문에 난리고 또 한쪽에서는 사연 있는 빈집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2023. 6. 2.
우리 동네 우리 동네 고당리는 산이 높아 해님도 힘들다고 쉬엄쉬엄 느지감치 올라온다네 우리 동네 고당리는 골이 깊어 햇빛도 바쁘다고 서둘러서 집으로 가버린다네 우리 동네 고당리에 햇살이 환하게 웃어주면은 계곡물은 좋아서 별처럼 반짝거리네 내 마음도 좋아서 환한 웃음이 나네 해님이 가버리면 달님이 와서 캄캄한 계곡물을 하얗게 비추어주네 우리 동네 고당리는 산들산들 나무들이 모여 살고 숲 속에는 새들이 지지배배 노래하네 물 맑은 골짜기마다 옹기종기 사람들은 장독대처럼 모여 산다네 된장찌개처럼 구수하고 맛나게 살아간다네 깊고 깊은 산골짜기 우리 동네 고당리 행복한 동네 해님, 달님, 계곡물, 나무, 새, 나, 너, 우리 모두 모여서 행복하다고 노래 부르네 완주 한글교실 양덕녀 님의 작품. 행복이 넘치는 '우리 동네' 풍.. 2023. 5. 22.
나도 그들처럼 나는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계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비의 말을 새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측량되기 전에는 나는 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해석이 되기 전에는 나는 대지의 말을 받아 적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동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시계가 되기 전에는 이제 이들은 까닭 없이 심오해졌습니다 그들의 말은 난해하여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측량된 다음 삶은 터무니없이 난해해졌습니다 내가 계산되기 전엔 바람의 이웃이었습니다 내가 해석되기 전엔 물과 별의 동무였습니다 그들과 말 놓고 살았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소용돌이였습니다 백무산 시인의 작품. 원시 이후, 인류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 난무하는 것은.. 2023. 5. 18.
가슴이 쿵쿵거리는 까닭 세상에는 아.름.답.네.요. 멋.있.어.요. 하며 치장한 말들이 많이 돌아다니지만 진정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입은 말門을 닫고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어쩌면 입보다 말은 먼저 알고 있다 당장 뛰쳐나가고도 싶지만 그의 요란한 발굽에 그의 뛰뚱거리는 몸짓에 그가 일으키는 바람에 혹시라도 아름다운 그것이 놀라거나 다치거나 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은 門앞에서 스스로 짧은 비명으로 멈춰선 뒤 발길을 돌려 가슴이라는 초원에서 숨이 차도록 뛰어다니는 것이다. 이명윤 시인의 '가슴이 쿵쿵거리는 까닭'이라는 시를 만난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 상 시마을에서 종종 본인 시를 올리고 또 내 시에도 댓글을 달아주던 시인으로 기억한다. 이즈음의 아름다운 꽃잔치를 보거나 여행 중 혼자 보기 아까운 경치를 보면.. 2023. 4. 29.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너희들이 좋구나 너무 좋아 쓰다듬어도 보고, 끌어안아도 보고, 그러다가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나, 너희들 들쳐 업는구나 너희들 나 들쳐 업는구나 우거진 잎사귀들 속, 흐벅진 저고리 속 으흐흐 젖가슴 뭉개지는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그렇구나 네 따뜻한 입김, 부드러운 온기 속으로 나, 스며들고 있구나 찬찬히 울려 퍼지고 있구나 너희들 숨결, 오래오래 은근하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껍질들아 껍질 두툼한 네 몸속에서 작은 풍뎅이들, 속날개 파닥이고 있구나 어린 집게벌레들, 잠꼬대하고 있구나 그것들, 그렇게 제 몸 키우고 있구나 내 몸에서도 상수리나무 냄새가 나는구나 쌉쌀하구나 아득하구나 까마득히 흘러넘치는구나 이은봉 시인의 작품이다. 상수리나무.. 2023. 3. 20.
비 개인 여름 아침 비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김종삼 시인의 작품이다. 그의 시는 은은한 여운이 매력이다. 마치 선경仙境이랄까 천상을 옮겨온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른다. 분명 시인은,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노래하는 금붕어를 닮고 싶었을 게다. 2023. 3. 12.
늦깎이 시 3수 작약 작약꽃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활짝 피어 있었다 사람도 꽃과 같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 보고 싶은 우리 부모님도 또 보고 얼마나 좋을까 날이 가고 달이 가면 꽃은 피었다 지고 열매를 맺는다 이 다음에 세월이 흐른 후 우리 자식들도 활짝 핀 작약꽃을 보며 내 생각을 하려나 내 마음의 일기장 2월 16일 남편을 요양병원에 보내고 왔다 오래 앓았지만 치매가 오니까 애들이 기어이 지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보내고 말았다 또 우리 집에 못 올 것 같다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한 송이 꽃 마당 앞에 핀 저 이름 모르는 꽃은 어찌나 향기가 그윽한지 눈을 감아도 그 모습이 예쁘게 떠오르는구나 나라는 꽃은 무슨 꽃이었을까 어버이는 나를 노란 개나리 같다고 하실 것이고 지아비는 나를 화사한 봉선화 같다고 할.. 2023. 3. 5.
가구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도종환 시인의 '가구'라는 작품. 살면서 타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뒤돌아보게 하는 시다. 가까이는 배우자.. 2023.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