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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27

가구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도종환 시인의 '가구'라는 작품. 살면서 타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뒤돌아보게 하는 시다. 가까이는 배우자.. 2023. 2. 15.
한계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 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천양희 시인의 '한계'라는 시. 살다 보면 지치고 지쳐서 막다른 골목에 와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 한계상황의 당신에겐 같이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위로를 받고 싶은 순간이다. 2023. 2. 12.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떠오르는 별 같은 것 문정희 시인의 시를 소개한다. 시제는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오늘날의 현대시를 메타포어로 분칠을 한 말의 홍수라고 했던가? 이런 탄식에서 조금 벗어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시를 만나고 함께 감상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2023. 2. 6.
이대환 벌써 몇십 년도 더 넘은 일이다. 일행을 태운 승용차가 포항 시내를 벗어나 영덕 쪽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포프라 우거진 신작로에 한 아주머니가 머리에 새참을 이고 한 손엔 주전자를 든 채 걷고 있었다. 운전석을 향해 "잠깐만요 선생님!"하고 내린 앳된 작가가 그 앞에 다가가 중학생처럼 꾸벅 절하고는 한참을 벌 받는 자세로 발끝을 비비다가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였다. 이시영 시인의 시에 '이대환'이란 작품이 있다. 이처럼 시에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들어가며 시로 표현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좀 낯설다는 느낌이다. 이대환이라는, 학창 시절 친구를 잘 알고 있어서일까 시가 더 다정다감하게 안겨온다. 2023. 1. 30.
미륵사지 석탑 허물어짐도 이토록 견고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니 하늘 받치고 싶은 층층의 꿈 제물처럼 포갠 채 천사백 년 두께로 고이고 있는 창창한 무게 때로 수천 번 마음이 무너져 땅 밑으로 가버리고도 싶으려니 눈 뜰 때마다 쉼 없이 파고드는 분열의 유혹 대님 치듯 동여 묶어 민흘림으로 다잡고 선 그대 발아래 질펀한 고통 구르는 낙엽에 얹어 날리며 홀로 오롯한 그대, 부서진 몸이 이렇게 찬연하다니. 정건우 시인의 '미륵사지 석탑'이라는 시. 살면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일은 고통을 수반한다. 시인은 미륵사지 석탑에서 부서진 몸을 본다. 질펀한 고통을 이겨내고 층층으로 꿈을 쌓아 올리며 홀로 오롯이 선 미륵사지 석탑이야말로 마음을 다스리려 애써본 사람들에게 참으로 견고하고도 찬연한 아름다움으로 온다. 2023. 1. 29.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 시인의 '너의 하늘을 보아'. 한때 현장의 노동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조용조용 혼자 읊는 시가 있는가 하면 독자에게 다가가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시가 있다. 개인사에 머물고 마는 시가 있는 반면에 더 많은 이가 공감하는 시가 있다. 2023. 1. 18.
꽃 핀다 꽃 진다 지난겨울 어떻게 살았느냐고 차꽃 필 때 동백꽃 필 때 매화꽃 필 때 꽃향 머금고 좋았노라고 지난겨울 또 어떻게 살았느냐고 차꽃 질 때 동백꽃 질 때 매화꽃 질 때 그때마다 겨울 산에 등 기대고 먼 산 보았노라고 꽃 진 겨울 이마에 생 바람 불어도 참 맑았노라고 한철 꽃 피고 꽃 지는 마음아 이 세상 어찌 살 것이냐 묻는다 해도 꽃 핀다 꽃 진다 할 뿐 석여공 시인의 '꽃 핀다 꽃 진다'라는 시. 산문山門에 들어 마음을 닦는 스님으로 산다. 시심도 맑은 시심이려니와 언어를 다루는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2023. 1. 17.
바다의 오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이생진 시인의 '바다의 오후'라는 작품이다. 마치 한 폭의 한가한 어촌 풍경을 보는 듯하다. 돌아보면 세월은 덜컹덜컹, 평탄한 노정은 아니었다. 어느새 함께 지냈던 아이들은 떠나고 노년의 인생만 남았다. 오후가 되면, 바다도 마을도 조금은 무료하고 때로 멍해지거나 게을러지기까지 하는 시간이다. 시곗바늘은 졸고 카메라의 눈동자마저 풀리는 그런 시간이랄까 2023. 1. 17.
노동절 오늘은 주차장이 텅 비었다 관리인도 나오지 않았다 오일 자국으로 얼룩진 광장에 온종일 햇볕이 내려 쪼이고 가끔 비둘기가 모이를 찾고 바람이 지나간다 일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널려진 물건들 하나도 없이 하늘 아래 비어 있는 땅 부당한 온갖 점거를 벗어나 잠시 제자리를 찾아 쉬고 있는 이 빈 터를 오늘은 주차장이라고 부르지 말자 김광규 시인의 '노동절'. 어렵지 않게 일상어를 늘어놓으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와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만드는 묘하게 감성을 건드리는 시다. 보통사람들에게 노동절이 노동자가 쉬는 날이라면 시인에겐 노동절은, 주차장이라는 풍경을 만나면서 색다르고, 좀 더 깊이가 있다. 하늘 아래 비어 있는 땅이 그러하고 부당한 온갖 점거를 벗어난 빈 터가 그러하다. 2023.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