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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텃밭48

수옥폭포에서 옛 선비들이 줄지어 거쳐갔던, 산새들 넘나드는 새재를 넘는다 발길이 닿는 대로 내려서다 구름을 이고 좌선을 구하는 몸 하얗게 부서져 낙하하는 물방울이 바위에 구르는 옥구슬을 닮아 수옥폭포라 했나 홀로 가을 단풍에 흠씬 취하여 한결같이 쏟아지는 폭포 소리에 묻히면 살아온 인생사 모두 씻을 듯하네 단지, 수옥을 만나 눈동자에 거슬리는 것은 저 바위에 새긴 유명 인사의 이름 어느 누가 권세를 가지고도 무엇이 모자라 이 선경仙境에 와 흠집을 내었나 자연이라는 아름다운 마음에 이렇게 못난 짓을 해놓고도 부끄럽지 않은지 나싱그리의 작품이다. 문경 쪽에서 새재를 넘어 수옥폭포를 찾은 적이 있었다. 오래전 일이다. 거짓말 안 보태고 정말 폭포 소리에 모든 것이 묻혀서 저절로 좌선이 될 듯한 분위기였다. 거기다 내 몸을.. 2023. 3. 21.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너희들이 좋구나 너무 좋아 쓰다듬어도 보고, 끌어안아도 보고, 그러다가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나, 너희들 들쳐 업는구나 너희들 나 들쳐 업는구나 우거진 잎사귀들 속, 흐벅진 저고리 속 으흐흐 젖가슴 뭉개지는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그렇구나 네 따뜻한 입김, 부드러운 온기 속으로 나, 스며들고 있구나 찬찬히 울려 퍼지고 있구나 너희들 숨결, 오래오래 은근하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껍질들아 껍질 두툼한 네 몸속에서 작은 풍뎅이들, 속날개 파닥이고 있구나 어린 집게벌레들, 잠꼬대하고 있구나 그것들, 그렇게 제 몸 키우고 있구나 내 몸에서도 상수리나무 냄새가 나는구나 쌉쌀하구나 아득하구나 까마득히 흘러넘치는구나 이은봉 시인의 작품이다. 상수리나무.. 2023. 3. 20.
장지葬地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또 하나의 생과 이별하고 있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장지葬地에 모여든 사람들은 추위에 떨면서도 천막 안에 앉거나 서서 급하게 차려진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겼고 생계를 책임진 한 가장家長은 심술 난 바람에 천막 폴대를 굳게 잡고는 놓지 않았다 여느 해처럼 그렇듯 주변에선 마른 도깨비바늘들이 스치는 옷깃에 달라붙어 다시 시작할 곳을 찾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비록 스산하지만 머지않아 봄은 찾아들 것이고 그러면 이곳에도 새싹은 돋고 이름 모를 들꽃도 피어나겠다 나싱그리가 쓴 '장지葬地에서'란 작품이다. 이별하는 슬픔은 잠깐이다. 유족이 아니면 더 그럴 것이다. 장지에서조차 삶은 엄연한 현실이다. 또한 자연은 우리에게 지혜를 일깨운다. 2023. 3. 17.
인왕산 근처 대로大路에 밀려난 독립문에 서면 전방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그 옛날 호랑이 울음소리 삼키고 이제는 산허리마저 등산객들에게 내어주고 지난 역사의 흔적들을 그저 말없이 내려다보는 인왕산 근처 나싱그리의 작품. 얼마 전, 3.1절에 인왕산 근처 서대문형무소에 들렀다. 독립문 앞에서 친구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날 이후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역사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고 시국은 온통 안갯속에 휩싸여 있다. '인왕산 근처'라는 시제로 이즈음의 단상을 표현해 보았다. 2023. 3. 12.
비 개인 여름 아침 비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김종삼 시인의 작품이다. 그의 시는 은은한 여운이 매력이다. 마치 선경仙境이랄까 천상을 옮겨온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른다. 분명 시인은,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노래하는 금붕어를 닮고 싶었을 게다. 2023. 3. 12.
가구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도종환 시인의 '가구'라는 작품. 살면서 타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뒤돌아보게 하는 시다. 가까이는 배우자.. 2023. 2. 15.
연밥 따기 노래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어두었지요.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秋淨長湖碧玉流 荷花深處繫蘭舟 逢郞隔水投蓮子 遙被人知半日羞 허난설헌의 시 '연밥 따기 노래采蓮曲'다. 예부터 연꽃을 소재로 한 연애戀愛 시가 많다. 민요로 전해오는 노래도 있다. 요즘처럼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허용치 않던 시대이지만 애틋한 연애의 감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감이 간다. 2023. 2. 12.
한계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 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천양희 시인의 '한계'라는 시. 살다 보면 지치고 지쳐서 막다른 골목에 와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 한계상황의 당신에겐 같이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위로를 받고 싶은 순간이다. 2023. 2. 12.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떠오르는 별 같은 것 문정희 시인의 시를 소개한다. 시제는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오늘날의 현대시를 메타포어로 분칠을 한 말의 홍수라고 했던가? 이런 탄식에서 조금 벗어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시를 만나고 함께 감상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2023.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