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주차장이 텅 비었다

관리인도 나오지 않았다

오일 자국으로 얼룩진 광장에

온종일 햇볕이 내려 쪼이고

가끔 비둘기가 모이를 찾고

바람이 지나간다

일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널려진 물건들 하나도 없이

하늘 아래 비어 있는 땅

부당한 온갖 점거를 벗어나

잠시 제자리를 찾아

쉬고 있는 이 빈 터를

오늘은 주차장이라고 부르지 말자


김광규 시인의 '노동절'.

어렵지 않게 일상어를 늘어놓으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와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만드는

묘하게 감성을 건드리는 시다.

보통사람들에게 노동절이 노동자가 쉬는 날이라면 

시인에겐 노동절은, 주차장이라는 풍경을 만나면서

색다르고, 좀 더 깊이가 있다.

하늘 아래 비어 있는 땅이 그러하고

부당한 온갖 점거를 벗어난 빈 터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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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병에 우유를 담는 일,

살갗을 찌르는 꼿꼿한 밀 이삭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를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을 거두어들이는 일


프랑스 출신 시인,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 의 시,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우리 인간에게 일이란,  하나님이 하는 일과 똑같이

아름다운 동역일 수가 있다.

일상적이며 사소한 것이 우리들의 일이기도 하지만

진정 성스럽고 위대한  것이야말로 인간의 일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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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갠 긴 강둑에는 풀빛 더욱 푸르른데

남포로 님 보내는 노랫가락 구슬퍼라.

대동강물은 어느 때나 마를 것인가

해마다 이별의 눈물만 푸른 물결에 더하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고려 때 정지상 시인의 '님을 보내며送人'라는 시.

우리에게 송별시, 이별 시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 옛날 대동강을 배경으로 고려인들의 이별의 정한을

이처럼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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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모년 모월 모일

하늘텃밭 운영을 종료합니다

 

그동안 이용했던

장비 및 시설물들

 

서운한 마음까지

모두 철거 부탁드립니다

 

관리자 백

 

뙤약볕에 우뚝 선 알림판 뒤통수를

 

올여름은

호박넝쿨이 휘감고 보란 듯이 자란다  


나싱그리의 '알림판'.

시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종종 주변의 일상어들이 시어가 된다.

마지막 5,6연에서 반전의 묘미를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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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내려놓겠네'

 

해인사 경내 어느 숲 속

큰 소나무 하나

이승으로 뻗은 가지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

 

지상으론 지천인 단풍

문득

누더기 한 벌뿐인 세상을 벗어 놓는다


윤석산 시인의 '입적入寂'이라는 시.

시를 편협되게 정의할 필요는 없다.

이런 시도 있고 저런 시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개인적 취향은 존중하고 싶다.

울림이 있고 깊이가 있는 시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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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식장에서

한 추기경이 추모사를 했다

그는 이 세상에 

나약한 인간으로 왔다가

용서가 되는 하나님 곁으로 갔다

 

이제 돌아간 그는 더 이상

힘센 독재자가 아니다

 

그제는 식장을 지나다가

한 과학자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더도 덜도 아니고

지하 2미터 아래, 흙으로 갔다

그런데 여긴 아름다운 별이다

단지 그걸 모르고 갔다

 

이곳에선 주검이 된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 빈소에서는

조문을 온 철학자가 있어

떠난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는 내 마음속에 

아직 살아 있는 친구

자네는 뭇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시인

 

어디서라도 마음이 기억하는 한

사라지는 것은 없다


나싱그리의 '장례식장에서'라는 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하나님 앞에서는 예외 없이 한 명의 인간일 뿐이고

물리적인 시각에서 보면,

죽음이란 단순히 흙으로 변하여 돌아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곳이 별이라는 신비한 사실을 잊는다.

살아도 기억에서 잊히면 이미 죽은 것과 같고

죽어서도 우리들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면

진정 살아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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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고운 님 울고 가셨는지

 

겨울이 시새움하는 새벽길엔

살포시 젖어서 흙내음만 날리고

고운 님 스쳐간 발자국 소리는

쫑긋 귀 기울여 본들 기척도 없네

 

어젯밤 고운 님 눈물 보였는지

 

새봄이 뒷걸음치는 출근길엔

웃을 듯 말 듯 꽃봉오리만 반기고

고운 님 나직이 속삭이던 모습은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간 곳이 없네


나싱그리의 시 '봄비'.

세상살이에 바쁘다 보니, 살면서 애틋한 감정을 찾기 어렵다.

아파트 입구 길가에는, 간밤에 살포시 내려앉은 봄비의 흔적만 남았다.

못내 아쉽다. 내게 그런 봄비는 고운 님과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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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른다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묻지 마라

거기 산이 있어 산에 오를 뿐

산 사나이로 태어나

그곳에서 떠나는 것도

멋진 인생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어떤 이는 정상을 기피한다

오르고 나서 안개와 구름 아래로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기는 하지만

거긴 너무 춥고 외로울 수 있다고

너무 오래 머물 곳은 아니라고

 

산을 오른다

정상이 목표가 아니어도 좋다

몸을 쉬어갈 산기슭이면 어떻고

찬바람 가시고 봄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느 산중턱이어도 좋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안다,

산을 더불어 오르는 것도

이 세상에서 힘들지 않게 하지만

산길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보는 이의 마음을 때로

아름답게 물들인다는 것을

 

그렇게 세상으로 통하는 길은

하나로 나 있지는 않다는 것을


나싱그리의 시 '등산에 대하여'.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서, 세상으로 통하는 길은

하나로 나 있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길만 고집했던 것이 때로 허사가 되고

이것이 나의 길이라고 밀어붙였던 것이

때로 회한이 되어 돌아온다.

이 세상의 사소한 것이 희망이 되고

너무 거창한 것이 짐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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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사이에 두고, 술 한 병 벗도 없이 홀로 마시네
잔 들고 밝은 달 청하니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구나
달이야 본래 술을 못 마시고 그림자는 나만 따라다니니
잠시 달과 그림자 벗하여 이 봄날 즐겨보자꾸나
내가 노래하면 달은 배회하고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 어지럽네
깨어 있을 때 함께 즐기고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지니
얽매임 없는 영원한 사귐 먼 은하에서 다시 만나자꾸나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 ' .

그 옛날 낭만주의자였던 시인은

꽃 만발한 정자에서 달과 그림자까지 청해 술을 마신다.

얽매임 없는 영원한 사귐을 먼 은하까지 연결시키는 시인이야말로

가히 시선詩仙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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