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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텃밭48

이대환 벌써 몇십 년도 더 넘은 일이다. 일행을 태운 승용차가 포항 시내를 벗어나 영덕 쪽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포프라 우거진 신작로에 한 아주머니가 머리에 새참을 이고 한 손엔 주전자를 든 채 걷고 있었다. 운전석을 향해 "잠깐만요 선생님!"하고 내린 앳된 작가가 그 앞에 다가가 중학생처럼 꾸벅 절하고는 한참을 벌 받는 자세로 발끝을 비비다가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였다. 이시영 시인의 시에 '이대환'이란 작품이 있다. 이처럼 시에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들어가며 시로 표현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좀 낯설다는 느낌이다. 이대환이라는, 학창 시절 친구를 잘 알고 있어서일까 시가 더 다정다감하게 안겨온다. 2023. 1. 30.
미륵사지 석탑 허물어짐도 이토록 견고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니 하늘 받치고 싶은 층층의 꿈 제물처럼 포갠 채 천사백 년 두께로 고이고 있는 창창한 무게 때로 수천 번 마음이 무너져 땅 밑으로 가버리고도 싶으려니 눈 뜰 때마다 쉼 없이 파고드는 분열의 유혹 대님 치듯 동여 묶어 민흘림으로 다잡고 선 그대 발아래 질펀한 고통 구르는 낙엽에 얹어 날리며 홀로 오롯한 그대, 부서진 몸이 이렇게 찬연하다니. 정건우 시인의 '미륵사지 석탑'이라는 시. 살면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일은 고통을 수반한다. 시인은 미륵사지 석탑에서 부서진 몸을 본다. 질펀한 고통을 이겨내고 층층으로 꿈을 쌓아 올리며 홀로 오롯이 선 미륵사지 석탑이야말로 마음을 다스리려 애써본 사람들에게 참으로 견고하고도 찬연한 아름다움으로 온다. 2023. 1. 29.
명일동 이야기 지하철역이 있고 아파트가 우뚝 선 근처, 그윽한 산자락에 자리한 이 층집 그곳에 들르면 귀한 차를 마신다 차의 맛과 자연의 멋을 아는 주인장을 잘 만나 산새 소리들도 모여 산다 비둘기에도 종류가 있단다 마음씨가 있단다 도시 길거리에서 온 비둘기와 자연을 고즈넉이 즐기는 비둘기 내는 목소리까지 다르단다 그러다 어떤 날이면 참새 두 마리 쌍으로 정찰병으로 왔다가 이내 무리를 이끌고 먹이를 찾아 날아든단다 나싱그리의 시, '명일동 이야기'. 살펴보면 서울 같은 도심에서도 작은 숲은 있기 마련이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울리는 운치가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명일동 주인장(봄빛향)과의 담소談笑가 시가 된다. 2023. 1. 29.
그대 이름은 지금도 찰리 찰리, 내 사랑! 아침이 그토록 눈부셨던 그날! 달콤한 작별키스 아직도 남아있는데 곧 돌아온다던 그 손 놓지 말 것을 지구 동쪽 끝 미지의 나라 달빛 곱던 강물이 선홍색 핏빛 되고 내 소중한 당신 잠들던 날 늦가을 붉은 사과 시리도록 아름다웠지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도 아직도 사랑하는 그대 나 이 세상 떠나는 날 한 줌재로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찰리, 내 사랑 호주 출신 올윈 그린Olwyn Green의 작품. 애드거 앨런 포우의 애너벨 리를 연상시키는 좋은 시입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 땅,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찰리! 그는, 그녀의 살아생전 잊을 수 없는 사랑의 동반자였고 죽어서도 같이 묻히기를 고대하던 사랑이었습니다. 2023. 1. 28.
바다와 예술 푸른 바다를 무대로 따가운 햇살 한가운데 한 어부가 멀리 대서양에서 표류한 인어공주의 입술을 막 훔칠 기세다 동풍을 등진 어부의 거친 손은, 어망漁網을 벗어나려 하나 어쩌지 못하는 인어공주를 품에 안는다 어부의 두 다리에 묶인 신화 속 그녀의 꿈이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나싱그리의 시 '바다와 예술'. 집 근처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조형물을 하나 만난다. 고목의 본래 느낌을 잘 살린 예술작품이다. 바다와 작품을 보고 있노라니 시심이 일어선다 마치 바다 위에 빛나는 저 비늘처럼.... 2023. 1. 24.
진달래 돌 틈새 뿌리 위태로워 잎이 쉬이 마르니 바람과 서리에 꺾이고 잘린 것으로만 알았네 들국화는 벌써 가을의 풍요 자랑하나 바윗가 겨울 추위 견디는 소나무 부러우리라 푸른 바닷가 향기 품은 애잔함이여 누가 능히 붉은 난간으로 옮겨 주리오 여느 초목에 그 품격을 비할까 보냐 나무꾼 눈에 띌까 두려울 뿐이네 石罅根危葉易乾 風霜偏覺見摧殘 已饒野菊誇秋艶 應羨巖松保歲寒 可惜含芳臨碧海 誰能移植到朱欄 與凡草木還殊品 只恐樵夫一例看 고운孤雲 최치원의 시, '두견杜鵑'. 진달래를 자신을 빗대어 노래했을 거라는 설이 관심을 끈다. 당나라에 유학 가서는 재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어쨌든 외국인이었고 고국 신라에 와서도 6두품이라는 신분을 안고 살아야 했을 터. 품었던 뜻을 펼쳐보고 싶었던 시인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2023. 1. 24.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 시인의 '너의 하늘을 보아'. 한때 현장의 노동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조용조용 혼자 읊는 시가 있는가 하면 독자에게 다가가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시가 있다. 개인사에 머물고 마는 시가 있는 반면에 더 많은 이가 공감하는 시가 있다. 2023. 1. 18.
꽃 핀다 꽃 진다 지난겨울 어떻게 살았느냐고 차꽃 필 때 동백꽃 필 때 매화꽃 필 때 꽃향 머금고 좋았노라고 지난겨울 또 어떻게 살았느냐고 차꽃 질 때 동백꽃 질 때 매화꽃 질 때 그때마다 겨울 산에 등 기대고 먼 산 보았노라고 꽃 진 겨울 이마에 생 바람 불어도 참 맑았노라고 한철 꽃 피고 꽃 지는 마음아 이 세상 어찌 살 것이냐 묻는다 해도 꽃 핀다 꽃 진다 할 뿐 석여공 시인의 '꽃 핀다 꽃 진다'라는 시. 산문山門에 들어 마음을 닦는 스님으로 산다. 시심도 맑은 시심이려니와 언어를 다루는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2023. 1. 17.
바다의 오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이생진 시인의 '바다의 오후'라는 작품이다. 마치 한 폭의 한가한 어촌 풍경을 보는 듯하다. 돌아보면 세월은 덜컹덜컹, 평탄한 노정은 아니었다. 어느새 함께 지냈던 아이들은 떠나고 노년의 인생만 남았다. 오후가 되면, 바다도 마을도 조금은 무료하고 때로 멍해지거나 게을러지기까지 하는 시간이다. 시곗바늘은 졸고 카메라의 눈동자마저 풀리는 그런 시간이랄까 2023.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