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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 시인의 '여승女僧'. 낯익지 않은 시어가 눈에 띄는데 이해를 돕자면 가지취는 산에 나는 취나물의 일종이라 하며 금점판은 금광캐는 광산을 떠올리면 될 듯... 섶벌은 재래종 일벌, 머리오리는 머리카락을 의미한다. 여승이 되기 전까지의 삶의 애환은 개인사이기도 하지.. 2022. 11. 30.
좋은 풍경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 '좋은 풍경'이다. 생리학적으로 보면 꽃을 피우는 것이나 남녀의 그 짓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도덕을 끼워 넣은 것은 인간이다. 알고 보면, 저 풍경들이야말로 세상이 원시이래 선물한 것이다. 2022. 11. 29.
행복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나태주 시인의 '행복'이라는 시. 농담조로 던져 본 말이 있다. 인생이 별 거 있느냐고, 깊게 생각하지 말라며.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 그것이 답일 수도 있다는... 아무튼, 행복이 뭐 별 거 있냐라는 생각에는 대체로 이의가 없을 거 같다. 작지만 소박한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가까이서 위안이 되어주는 것이 행복이다. 2022. 11. 28.
갈꽃이 피면 갈꽃이 피면 어이 하리 함성도 없이 갈채도 없이, 산등성이에 너희들만 나부끼면 어이 하리 눈멀고 귀 멀어, 하얗게 표백되어 너희들만 나부끼면 어이 하리 아랫녘 강어귀에는 기다리는 처녀 아직껏 붉은 입술로 기다리는 처녀 송기원 시인의 '갈꽃이 피면'. 그는 소설가로 더 유명하다. 시에서도 여운이 살아있는 깊이가 있다. 겉으로 드러난 풍경과 숨겨진 의미가 조화를 이룬다. 한 영혼의 울림이 새벽을 기다리는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다. 2022. 11. 27.
청산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내려놓고 미움도 내려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내려놓고 탐욕도 내려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聊無愛而無憎兮 如水如風而終我 ​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聊無怒而無惜兮 如水如風而終我 고려 말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시. 노래로도 불려져 우리들 귀에 익다. 인생을 살면서 마음을 다스리려면 사랑과 미움, 성냄과 탐욕 모두 내려놓을 대상일 뿐이다. 2022. 11. 26.
내시경 잔잔한 음악을 튼다 내면의 바다엔 선율이 흐른다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돛대에 붙들어 두고 안을 들여다보는 매의 눈 무지한 삶의 주름들이 즐비한 어둠의 통로를 지난다 인생길의 어디쯤 어떤 침입자가 숨어들었을까 애당초 평탄한 길을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뚫을 길은 있기는 한지 매의 눈을 빌어 안을 살피고 있다 나싱그리의 '내시경'이라는 시. 인생을 살다보면 걱정거리가 하나둘이 아니다. 무지한 것은 우리들 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터. 내시경이 매의 눈을 닮았다는 것에 착안하여 삶의 애환을 표현해 보고자 했다. 2022. 11. 25.
절벽 절벽 가까이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미국 출신 로버트 쉴러Robert H.Schuller의 '절벽'.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표절(?)한 듯한 느낌이... 마지막 2행의 시구詩句가 압권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지혜,능력,용기를 깨닫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 하는 내용입니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찾아낸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2022. 11. 25.
가지 않은 길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들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을 남겨 두었습니다 같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2022. 11. 25.
민간인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담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스무몇 해나 지나서도 그 수심을 모른다 김종삼 시인의 '민간인'. 분단의 참상을 정제된 표현으로 잘 드러낸다. 70년이 지난 오늘도 남북의 분단은 현재 진행형이다. 잠시 화해하는가 싶더니 다시 얼어붙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 전쟁은 일어나고 많은 민간인이 죽어나간다. 시인은 뭇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고발자다. 2022.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