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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숲을 찾아서54

판전板殿 칠십 평생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추사秋史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병중 마음에 피어나 '판전板殿'이라는 글씨로 봉은사에 자리 잡은 그 현판 어리숙한 듯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한 대가의 필치는 젊은 날 예술의 시비是非를 풍경 소리에 날려 보내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절대 순진무구함의 경지에 들었구나 나싱그리 시. 봉은사에 가면 판전을 만날 수 있다. 경판을 쌓아두는 전각이 있는데 거기 걸린 현판이 판전이라는 글씨다. 만년 추사秋史 김정희의 흔적이다. 2023. 8. 31.
앙큼한 꽃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 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 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손택수 시인의 '앙큼한 꽃'이라는 시.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삶의 터는 정이 메마르고 여유와 배려가 사라진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그런 세상에는 하나같이 싸움이 늘기 마련이다. 2023. 8. 30.
검과 칼 물건이 있으면 그 쓰임이 있다 양날이면 검이라 하고 보통은 칼이 된다 일찍이 장수는 명분이 섰을 때만 전쟁터에서 검을 썼고 섣불리 검을 뽑지 않았다 한편 우리 가정에서는 요리를 위해서만 칼을 썼고 그것을 화목으로 알았다 이 세상에 뜻을 품고 나온, 검과 칼인데 짐승도 아닌 사람이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휘둘러서야 쓰나 나싱그리 시. 요즘 도심 번화가에서도 칼부림 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다. 사람이란 본디 선한데 마음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듣는다. 2023. 8. 27.
우리 사이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려나 우리 사이 인연이면 또 만나겠지 바쁜 인생일랑 잠깐 벗어 접어 두고 다 같이 둘러앉아 백련차 한잔 하고 가시게나 지쳐 버린 몸뚱이 편히 다스려 준다는 정성 어린 백련차 한잔하고 가시게나 복잡해진 마음 맑게 씻어 준다는 그 영험한 백련차 한잔하고 가시게나 나싱그리 시.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만나 가끔씩 모임을 갖는다. 그래도 마무리는 역시 전통차를 음미하면서 담소하는 것이 그만이다. 2023. 8. 26.
한성 옛터 실핏줄 같은 물줄기로 흐르다가 아리수에 와닿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현대식 빌딩숲에 화려한 네온사인 오랜 세월 아무런 관심조차 받지 못하다가 서울 변두리 재건축 아파트 밑에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긴 잠에 빠졌다가 그 위용을 드러낸다 문명의 꽃이란 이 세상에 나와 활짝 피었다가 때가 되어 그렇게 흔적을 남기는 법 한성 옛터에 들러 잠시, 바쁘게만 돌던 시곗바늘을 세우고 이 땅에서의 지난한 흥망성쇠를 반추하는 시간 나싱그리 시. 서울 송파구에 소재한 한성백제 박물관에 들러 한성 옛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지금은 풍납 토성, 몽촌 토성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 땅에서의 지난한 흥망성쇠를 보는 듯해서 감회가 새롭다. 2023. 8. 25.
어허 초등학교 근처 어린이 보호 구역 건널목 신호등은 아직 빨간불이다 신사복 차림의 어른이 출근길 급한 마음에 경계석을 넘어 한 발을 덥석 내딛는다 그때 '어허'하며 누군가 소리친다 뭘 그리 급하실까 따끔하게 혼을 낸다 모습은 초등학교 저학년인데 목소리는 엄숙한 호랑이 선생님 어린이 보호 구역에선 나이순이 아니라 바른 생활을 하는 어린이가 왕이란다 오늘 아침 겁 없는 꼬마 앞에서 신사는 그만 체면을 구기고 만다 나싱그리 시. 아는 것과 지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어린이 보호 구역 내가 아니더라도 배움은 나이순이 아니다. 2023. 8. 21.
용두골 아리랑 저녁 어스름이 밀려오면 삼삼오오 뭉쳐서 기웃대던 용두골 오랜 맛집이 즐비한 서대전 사거리 근처 용두시장 골목을 우리들은 줄여서 용두골이라 즐겨 불렀다 진한 소주보다는 컬컬한 막걸리 몇 사발 안주도 없이 들이키고는 수고 많으시다며 점주에게도 한 사발 권하면 우리 모두가 시장 사람 그렇게 인생의 진국을 논하다가도 일차가 끝나기도 전 취기가 돈다며 귀가를 서두르던 선배 그때 그 정겨웠던 우리들의 용두골 아리랑 개발이라는 논리를 떠나 시장 단골손님들의 아스라한 기억 속에선 아름다운 전설로 남는다 나싱그리 시. 한때 서대전 사거리 근처에 근무하며 먹자골목을 자주 이용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지만 당시엔 술을 좀 했었다. 그래서 마음이 맞는 동료들이랑 어울리는 일도 많았다. 그 추억을 살려 용두.. 2023. 8. 20.
결혼식장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바쁜 시간을 할애한 친지들을 모시고 인생 2막이 열리는 식장 사방의 집중된 시선으로 무대는 서치라이트 불빛처럼 환하다 자필 성혼 선언문이 낭독되기에 앞서 두 부녀가 선보이는 현란한 댄스와 함께 분위기는 무르익고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영상편지를 교환할 때 신부의 눈가를 적시는 촉촉한 눈물은 정겹다 지금까지 달콤한 연인에서 이제 서로를 배려하는 부부로 뜨거운 박수와 환호 속에 다시 도약하는 청춘 나싱그리 시. 요즘 결혼식장이 성업 중이다. 인생에서 결혼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청춘을 한 단계 성숙시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두 부녀의 현란한 댄스와 함께 시작하는 결혼식 입장은 하객들에겐 또 하나의 선물이다. 2023. 8. 20.
수채화 마음 바탕에 그려 보는 수채화 한 폭 팔레트 물감은 빨강이건 파랑이건 너무 진하지 않아야 한다 또 좋은 그림은 임자를 만나면 몇 번의 터치로도 족한 법 우리가 준비한 붓도 자주 가지 않아야 좋다 본래 마음을 잘 드러내려는데 심한 덧칠로 작품을 망칠 일은 없다 나싱그리 시. 문득 수채화를 떠올리다가 마음 바탕을 생각한다. 진한 색감과 덧칠을 걷어 내야 좋은 수채화가 되듯이 우리들 관념과 편견을 벗어야 본래 마음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 2023. 8.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