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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시 산책

내가 가장 예뻤을 때

by 하늘텃밭 2024. 1. 3.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지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난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건네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해맑은 눈길만을 남긴 채 다들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무디어졌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있단 말인가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 재즈가 넘쳐흘렀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난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하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난 아주 불행했다
  난 무척 덤벙거렸고
  난 너무도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될수록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일본 태생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의 작품.

윤동주의 '서시'  '쉽게 씌어진 시'  '아우의 인상화'를

기억하는 여자.

생전,  시인 윤동주와 한글을 아꼈던

인간미 넘치는 시인.

1945년 일본이 패전했을 때는

그녀 나이 열아홉 살이었고

32살이 되어서 20대 초기를 회상하며 쓴 시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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